카메라에 필름을 넣는 순간은 항상 특별하다.
한롤에 한정된 필름의 컷수만큼 한장 한장 정성스레 담길 결과물을 생각하면
이미 그 설레는 기대감에 대한 값을 지불한 것 같아 필름값도 아깝지 않을 정도다.

이런 필름중에서도, 흑백 필름을 쓸때의 느낌은 더욱 각별하다.
한장 한장 예술적인 사진이 나올것만 같은 기대감 때문에
흑백 필름을 장전하는 그 순간 이미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하고,
결과물이 색과 채도가 빠진 명과 암만으로 표현될 것이 때문에 더욱 치열하게 대상에 집중하게 된다.

문득, 누군가와 만남을 시작할때의 기분이 
이렇게 흑백 필름을 넣은 카메라의 첫 셔터를 누르는 것과 기분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똑같은 카메라로 비슷한 이미지들을 찍어대던 일상중에 찾아오는 특별한 한번의 기회.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운 피사체로 보이는 신비한 경험.

하지만 필름이 카메라에 머물러있는 기간동안
셔터를 누를수록 스스로가 흑백사진을 찍고 있다는 것을 서서히 잊게 되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피사체를, 또 카메라를 대하게 된다.

결국 작품으로 남을 것 같았던 사진들은 정상의 이미지에서 색만 쏙 빠진
'가장 보통의' 혹은 '보통보다 못한' 사진들이 되어버리고,
어느 순간엔 흑백 필름 때문에 그렇게 설레던 날들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게 된다.

오랜만에 꺼내본 흑백 사진은 색이 빠진 추억마냥 덩그렇다.

하지만 언제나 다시 한발을 내딛게 하는 것은 망각의 힘.
나는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설렘에 가득한 표정으로 흑백 필름이 든 카메라를 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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